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술을 마시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편의점에서 맥주 네 캔을 사왔다. 종일 침대에서 엎드려 읽던 책은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내팽개치고 이불을 끌어모아 앉은 채로 맥주를 홀짝대기 시작했다. 얼마 전 선생님들과 마신 알코올이 아직도 몸에 남아있을 느낌이지만 주종이 다르니 무시하기로 한다. 맥주를 사는 도중 신분증 검사를 했다. 처음 가는 가게에서 종종 겪는 일인데 하필 신분증이 깊숙한 곳에 숨어있어서 맥주를 못 살 뻔했다. 나이 서른하나라는데 감사해야 할 일인지 탐탁잖아야 할 일인지. 


  오후 4시쯤 걸려온 전화에서는 낯선 사람이 내 근황을 물었고, 나는 딱히 숨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해 간략한 근황을 전했다. 그리고 수화기 넘어에서 들려온 소리는, "많이 힘드시겠어요". 하, 어쩌란 말인가. 위로를 받고자 한 게 아니었기에 반사적으로 "아닙니다, 괜찮아요"가 튀어나왔고 상대 또한 당혹감을 언뜻 느꼈는지 언제든 연락 달라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사실 그렇다. 낯선 사람들이 쏟아내는 그런 방법들로 내 문제를 '공식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다. 문제는 내 바람이 '비공식'이라는 것, 때문에 우회로를 뚫어야 하는데, 깨나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사실 현 체제에서는 별다른 방도가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때문에 어디서 쏟아지는 어떤 말도 거기서 거기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통화가 끝난 후 내가 조금 덜 쫄보이거나 조금 더 쫄보라면 이런 애매모호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한참 머릿속을 휘저었는데, 이러나 저러나 이번 주말 안에는 결론을 내고 정리를 하고 보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직시하자 마자 스트레스로 머리가 지끈거리고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발생했는데 해결을 위해 단 한 자도 적지 못하고 있다. 지금 나는 그냥 쾌적한 곳에서 쾌적한 생각을 하며 쾌적한 상태로 쾌적한 몸을 뉘이고 싶은 생각 뿐이라 사실 고용량의 신경안정제도, 좋아하는 알코올도, 현실도피성 책 몇 가지도 아무 소용이 없다. 아 그래도 죽거나 더 아프기는 무서운지 동시에 모든 걸 털어넣는 것 대신 약 또는 알코올이라는 차선을 택하기는 한다. 


  조금 외로운 것 같다. 어디 떠들 곳도 없고, 아픈데 연락할 곳도, 연락한다고 달려와줄 누군가도 없다. 그렇게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는 걸 좋아하던 사람이 끼니를 배달음식으로 전전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재해석하기를 일삼던 감각들은 어디 도피라도 한 건지 불안과 우울만 잔뜩 남아 스스로를 가두고 핍박하며 한없이 포기를 강요하고 있다. 하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틀을 벗어난 탓에 이제 돌아갈 곳도 없다. 혹시 이제는 괜찮을까 싶어 서른의 막바지에 내비친 솔직함에서는 서러움과 짠내와 폭력의 그림자, 설움과 욕설들이 난무했고, 그 순간 난 평생 그들에게 내 진심을 보이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고 나서 달려나간 곳에는 당시 1순위라고 믿던 차선이 하나 있었고, 그 차선은 각종 이유로 말미암아 서로에게서 벗어났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 차선이 아닌 참선이 있기도 했었다. 그들은 우선이 되기도 하고 참선이 되기도 하고 차선이 되기도 했었다. 그래도 한결같았던 건 확신이 있었다는 것. 사실 자아가 생기고 2차성징을 거칠 시기부터의 내 우선순위는 그게 다였다. 사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는 거지만 내 자신에게 그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기까지의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과정을 지난 사람은 언제나 내게 믿음의 대상이었고, 경애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로 인해 제법 오랜 시간동안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참으로 감사한 사람들. 이런 경험들로 인해 어쩌면 지금의 인생이 더 외로운 것만도 같다. 


  할 일이 너무 많이 쌓여있다. 원래 일을 미루는 성격이 전혀 아닌데, 평생 이토록 주어진 일을 미뤄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사실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것 같다. 누군가가 이 수십 개의 파일을 들으며 타이핑해 준다면 내일의 나는 작은 숨이라도 쉴 수 있을 것 같지만, 이 모욕들을 내 지인들이 알게 된다면 그것 또한 못 견딜 것 같으니 결국은 또 혼자 견뎌야겠지. 이 핑계로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뤄본다.

오늘만은 지독한 신경안정제와 항경련제 대신 맥주나 마셔야겠다.